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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 ‘시대의 큰 어른’ 의재 허백련의 삶과 예술을 생각하다
2024-06-17

광주일보 

http://www.kwangju.co.kr/article.php?aid=1718187000769424007



‘시대의 큰 어른’ 의재 허백련의 삶과 예술을 생각하다

‘삶과 예술 -자료전’ 10월27일까지 의재미술관, 어록·신문기사·사진·작품 등

“지혜 가르쳤던 허백련 선생 기억하는 시간 됐으면…”



“삶과 예술은 경쟁하지 않는다.”


전시실 내부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문구다. 삶은 숭고하며 그 자체로 고귀하다. 예술 또한 지고한 가치를 추구하는 과정이기에 소중하다. 혹여 삶은 예술처럼, 예술은 삶처럼 살라는 의미가 아닐지. 삶을 앞자리에 둔 것은 아무리 예술적 재능이 탁월하다 해도 사람됨, 삶의 본질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뜻인 것도 같다.


“삶과 예술은 경쟁하지 않는다”는 의재(毅齋) 허백련(1891~1977)의 어록 가운데 많은 이들에게 회자된 말이다.



무등산 증심사 계곡 등산로 자락에는 의재미술관(관장 이선옥)이 있다. 녹음이 우거지고 나무들이 빽빽하게 에두른 곳에 자리한 미술관에 들어서면 의재 허백련의 성정을 느낄 수 있다. 건물들은 경사면을 따라 배치돼 단을 구성하면서도 자연에 순응하는 이미지를 발한다.


시절이 수상한지라 사람들은 의재의 정신을 이야기하곤 한다. ‘시대의 큰 어른’이었던 의재는 하늘과 땅, 사람을 사랑하자는 ‘삼애사상’(三愛思想)을 추구했다. 사실 오늘날 제 분야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는 우리 삶의 근간인 ‘삼애’가 부족에서 비롯됐다. 하늘과 땅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이라면 결코 무도하고 염치없는 길을 가지 않기 때문이다.


의재 허백련의 삶과 예술을 사유해보는 전시가 열리고 있어 눈길을 끈다.



최치국 작 ‘의재 허백련 초상’

의재미술관에서 오는 10월 27일까지 진행하는 기획전 ‘삶과 예술-자료전’은 시대의 어른이었던 의재를 다채로운 자료를 통해 만나는 시간이다. 허백련은 남종문인화의 거장이면서 무등산 춘설헌에서 그림을 그리고 농업학교를 세워 농업지도자를 길러냈다.



이번 전시에서 눈에 띄는 자료 가운데 하나는 최치국의 ‘의재 허백련 초상’이다. 노년의 의재를 사실적이면서도 담백하게 묘사했다. 의재가 그림을 그리는 장면을 구현한 작품으로, 평소 강조했던 화론이 적혀 있다.


“고법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손에 있는 것도 아니며, 또 고법과 내 손밖에 벗어나지 않는다. 금강저와 같은 필봉은 습관을 탈피하여야 한다.”


예술의 본질, 작품을 대하는 자세가 집약된 글귀다. 새로움에 대한 추구는 익숙한 것으로부터의 결별임을 암시하는 내용이다.


선생을 다룬 다양한 신문기사도 볼 수 있다. 1971년 12월 서울신문회관 화랑에서 열린 ‘동양화 6대가전’에는 허백련의 ‘추강귀어’가 지면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화가로서의 위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의재 허백련, 이당 김은호, 심산 노수현, 소정 변관식, 심향 박승무, 청전 이상범이 함께 한 전시에 대해 “한국 동양화단의 최고 원로 화백 여섯 분의 심오한 노경의 작품들을 초대 전시하는 최초의 동양화 6대가 전람회”라는 글귀가 기술돼 있다.


1938년 설립한 연진회와 설립 배경, 회원들의 명단 등도 있다. 지금 읽어도 그 뜻은 깊고 담백하다. “예술을 닦는 사람은 반드시 그 참다운 예술의 경지에 이르는 일이요, 양생을 닦는 사람은 그 참된 근원을 보존 하는 일이다. 우리 회가 예락을 바탕으로 서로 모여서 삶을 값지게 보내기 위해 ‘연진’(鍊眞)이라 이름 지으니 그 누가 거짓이라 하겠는가”


광주시 문화유산자료인 석아정(石啞亭)·오방정(五放亭) 현판을 만나는 것도 즐거움이다. 이 현판은 한쪽에는 ‘석아정’. 다른 쪽에는 ‘오방정’이라고 양각돼 있다. 여기에는 광주 개화를 이끌었던 석아 최원순, 오방 최흥종, 의재 허백련의 인연이 깃들어 있다.




광주 개화를 이끌었던 석아 최원순, 오방 최흥종, 의재 허백련의 인연이 깃든 현판. 오방정과 석아정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던 최원순은 건강이 나빠져 광주로 내려온다. 춘설헌 자리에 집(석아정)을 짓고 요양을 했다. 당시 현판은 서예가 성당 김돈희가 썼다. 이후 최흥종은 최원순으로부터 석아정을 물려받아 ‘오방정’이라 이름을 짓고 생활했다. 당시 허백련은 석아정 현판 뒷면에 ‘오방정’ 글씨와 함께 매화 그림을 그려 넣었다.


한마디로 현판은 20세기 초 광주근현대사를 이끌었던 3인의 흔적이 깃든 공간의 표식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밖에 전시실에는 ‘삼애정신’을 소전 손재형이 표현한 서예 작품을 비롯해 춘설헌을 찾은 인사들과의 사진 등도 비치돼 있다.


이선옥 관장은 “‘의재’(毅齋)라는 호는 ‘강한 집’이라는 뜻을 내재하고 있는데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집뿐 아니라 의재 선생은 내면의 집, 마음의 집도 집이라 상정했다”며 “다양한 자료를 통해 격변의 시기 많은 이들에게 지혜를 가르쳤던 시대의 큰 어른을 기억하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고 전했다.